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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편집 2024-05-0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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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일 태권도신학연구소장./태권도선교신문 DB

 

태권도선교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공식적으로 태권도선교를 위해 선교사를 모집하고 교육하고 훈련하여 파송 한지는 대략 4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40여년 동안 태권도선교는 자신학화에 대한 질문이나 필요성에 대한 내용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태권도선교는 주로 일반선교의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기 때문에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적 신학이 없는 선교는 성경적 선교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성경적 태권도신학이 없는 태권도선교는 성경적 선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태권도선교가 전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진행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권도신학과 그 필요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8 주에 걸쳐서 태권도신학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글을 쓰려고 합니다. 우선 태권도선교가 신학적으로 정립 가능하게 된 배경에 관하여 선교신학의 발전과정을 설명함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원합니다.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태권도선교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태권도선교신학에 관하여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선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상황화와 함께 토착화라는 단어에 익숙할 것입니다. 토착화는 교회론에 의해 토착민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발전하게 된 선교신학 개념입니다.


개신교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시기는 강대국들이 식민지 지역을 활발하게 확장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선교신학이 발전하지 않아서 대부분 서구 선교사들은 강대국이 점령하고 있는 식민지로 파송되어서 서구 유럽교회를 절대적 성경적 교회로 인식하고 식민지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문화는 문명의 발전에 의해 진화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주민들의 문화는 원시문화이고 서구문화는 선진문화로 여김으로 원시 문화권에 들어가 문명을 개발해 주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서구 선교사들의 이러한 선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문화가 다른 선교지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연 토착민들의 문화를 서구문화로 바꾸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런 소수의 의견은 다수의 흐름에 의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식민지 교회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서구문화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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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일 태권도신학 칼럼] 태권도신학이 필요한 이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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